9월30일 서울 송파구 가락동 농수산물도매시장의 배추 경매 현장. ©시사IN 김다은
바닥에 떨어져 있던 ‘경매 감정용 배추’를 김숙자씨(가명)가 급하게 주웠다. 김씨는 아들과 함께 40년째 배추 유통업을 하고 있는 베테랑 유통업자다. 그는 한 망(3포기)에 3만1000원을 주고 배추를 낙찰받았다. 그가 집어든 경매 감정용 배추는 경매가 시작되기 전, 배추 상태를 확인하도록 배추망에서 한두 포기씩 꺼내둔 것이었다. 감정용 배추도 낙찰자의 몫이긴 하지만 배추가 헐값일 때는 대개 버려두고 가기 마련이다. 요즘은 사정이 달라졌다. “이게 지금 한 포기당 만원인 거잖아요. 이것도 귀한 거야. 그러니 당연히 챙겨 가야죠.” 김씨가 배추의 푸른 겉면을 떼어내며 말했다.
9월30일 방문한 서울 송파구 가락동농수산물도매시장(가락시장)의 배추 경매는 여느 때와 같이 밤 11시에 시작됐다. 경매사들이 배추단을 쌓아놓은 팰릿 앞에서 독특한 구호와 함께 소리를 치면 입찰기를 든 유통업자들의 손이 빨라졌다. 1차 경매는 17분 만에 끝났다. 김숙자씨는 최근 가락시장에 들어오는 배추 수량 자체가 평소의 3분의 2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면서도 이번 주 들어 사정이 나아진 거라고 말했다. “얼마 전에는 한 망에 7만원이 넘었는데 지금은 3만원대예요. 좀 숨통이 트인 거지. 내가 배추를 오래 취급했는데도 이런 가격은 진짜 처음 봐.” 한 망에 7만원씩 하는 배추는 어디서 사가느냐고 물으니 예상하지 못한 답이 돌아왔다. “유명한 칼국숫집 같은데서 가져가죠. 무조건 맛있는 국내산 김치를 내놔야 하는 식당들.” 농산물 원산지표시제에 따라 식당에서는 배추의 원산지를 소비자들이 볼 수 있게 표기해야 한다. 국내산 배추여야 소비자들이 만족하는 대형 프랜차이즈 외식업체들은 사계절 내내 국내산 배추가 필요했다.
마침 이날 송미령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은 정례 기자간담회에서 배추 수급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중국산 배추를 수입한다고 밝혔다. 송 장관은 2년 만에 수입되는 중국산 신선 배추 초도 물량 16t이 9월26일 국내에 들어왔다는 설명과 함께 배추 수확량에 따라 10월까지 최대 1100t을 추가 수입할 수 있다고도 말했다. 국내에 이미 반입된 16t 규모(약 5300포기)는 외식업체와 식자재 업체에 제공될 예정이었다.
정부 조치에 대해 유통업체는 시큰둥한 반응이다. 우선, 신선 배추 내수시장으로 유입되는 물량이 아닌 만큼 도매가격 안정화에 실효성이 없을 거라고 봤다. 가락시장 도매시장법인의 한 관계자는 〈시사IN〉과의 인터뷰에서 이번 중국산 배추 수입 결정은 김치업체들에 ‘정책 시그널’을 주는 상징적 행보에 그칠 뿐이라고 평가했다. 심지어 김치 완제품 업체에서도 중국산 배추가 매력적인 상품이 아닐 거라고 예상했다. 가장 큰 이유는 국민들의 김치에 대한 인식 때문이다. “국내 업체가 만든 완제품이라도 원재료가 중국산이면 ‘메이드 인 차이나’ 김치가 되는 거다. 한국 소비자들은 웬만하면 이런 김치를 선택하지 않는다. 업체들이 이런 소비자들의 심리를 모를 리 없다. 업체로서도 국내산 배추를 이용한 ‘믿을 수 있는’ 김치를 만든다는 브랜드 이미지를 포기하면서까지 중국산 배추를 이용하는 선택을 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중국산 수입 배추가 국산 배추의 대체재가 돼 수급 불안을 잠재우기가 쉽지 않으리라는 분석이다.
정부의 이번 조치가 기후위기 시대에도 농산물 정책을 여전히 ‘먹거리 관점’이 아닌 ‘물가 관점’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줬다는 평가도 나왔다. 정은정 농촌사회학자의 말이다. “강원도는 여름 채소를 떠받치는 상징적인 지역이다. 하지만 농민 고령화, 기후변화로 면적 대비 고랭지 배추 생산량도 감소하면서 농가소득 보존이 점점 어려워졌다. 이런 어려움 때문에 ‘여름 배추’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알 수 없다는 진단은 일찌감치 나왔다. 농민과 전문가들은 고랭지 배추 농업을 살릴 의지가 있는지, 아니면 이대로 포기할 건지 정부에 계속 물어왔다. 하지만 정부는 지금까지 중장기적인 식량 정책을 내놓지 않고 답을 회피해왔다.”
송미령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이 9월29일 전남 해남군 일원의 배추밭을 찾아 김장 배추 작황을 점검하고 있다. 농림축산식품부 제공.
물가안정 효과 미미한 ‘묻지마 수입’
현 정부는 할당관세 제도를 통해 수입 배추 관세를 모두 깎아줌으로써 이 질문에 대답을 한 셈이다. 배추는 이전 10년간 할당관세가 적용된 적이 없는 품목이다. 할당관세는 정부가 특정 수입품에 대해 무관세 혹은 저관세를 적용할 수 있게 하는 제도다. 지난 4월 정부는 물가를 안정화한다는 명분으로 ‘제19차 물가관계차관회의’에서 5월10일부터 10월31일까지 수입되는 배추 전량에 대해 0% 관세를 적용하기로 결정했다. 윤석열 정부는 올해 들어 과일류 21개 품목부터 대파·양파·당근 등 한국인 식생활과 관계가 깊은 민감 품목에 대한 할당관세를 폭넓게 적용했다. 9월29일 임미애 의원(더불어민주당)이 농림축산식품부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2021년 20개에 불과하던 농축산물 할당관세 적용 품목은 윤석열 정부 첫해인 2022년 35개, 지난해에는 43개로 늘었다. 2023년 할당관세에 따른 관세지원액은 3934억원에 이른다. 올해는 상반기에만 67개 품목에 할당관세가 적용됐다.
이런 ‘묻지마 수입’ 정책에 대해 크게 두 가지 문제가 지적된다. 첫째, 할당관세는 소비자 물가안정 효과가 크지 않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의 ‘2022년 할당관세 품목별 물가안정 효과’ 보고서에 따르면 소비자가 직접 구매하는 최종재의 관세를 1% 인하할 경우 소비자가격 인하 효과는 소고기 0.12%, 돼지고기 0.60%, 닭고기는 0.29%가 최대치였다. 수입업체가 받은 할당관세 혜택이 소비자 판매 가격에 충분히 반영되지 않았다는 의미다. 해당 보고서는 소비자가 직접 소비하는 품목보다 중간재 품목을 지원할 경우 물가안정 효과가 즉각적이고 강하다고 설명한다.
9월30일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 이천비축기지에서 관계자들이 중국산 수입 배추를 살펴보고 있다. . ©공동취재
두 번째 문제는 관세법의 애초 취지를 잘못 적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관세법 제71조는 할당관세를 적용할 수 있는 특수한 조건을 설명한다. 수입물품에 대한 관세를 할인함으로써 정부는 세수 손해를 감수해야 한다. 따라서 이런 이익을 포기할 만큼 경제적 효과가 확실하고 법이 정한 근거에 명확하게 합당할 경우 할당관세를 적용하도록 하고 있다.
관세법에 따르면 ‘수입가격이 급등한 물품 또는 이를 원재료로 한 제품의 국내가격을 안정시키기 위하여(제71조 2항)’ 할당관세를 적용할 수 있다. 국내산 물품의 가격이 아니라 수입산 물품의 가격이 일정 수준 이상 상승해 소비자에게 타격이 있을 때 관세를 조정해 국내 도입가와 균형을 맞춘다는 의미다. ‘2024 국정감사 이슈 분석’ 중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 보고서에서도 해당 내용을 지적한다. 보고서는 “만일 대파, 양배추, 당근, 배추 등의 농산물 품목에 할당관세를 적용하려면 그 명분은 이들 품목의 국내산 가격이 아니라 수입산 가격에 기반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법에 명시된 또 다른 조건 중에는 ‘원활한 물자수급(제71조 1항)’이 필요할 때도 있다. 이번 배추 품귀 현상이 적용되지 않을까? 해당 조항의 의미를 김규호 국회입법조사처 입법조사관에게 물었더니 2021년 요소수 사태를 예로 들었다. “국내에 대체재가 거의 없는 특정 물자 수급에 어떤 이유로든 문제가 발생했다고 생각해보자. 그럴 경우 정부는 할당관세를 적용해 글로벌 시장에 우호적인 시그널을 줄 수 있다. 예컨대 중국에서 요소수 수출량을 줄여 국내 피해가 커진다면 정부가 저관세 카드를 활용함으로써 요소수 수출국과 수입업체 등에 사인을 보내고, 시장 불안 심리를 진정시키는 효과를 거둘 수 있다.”
이번처럼 일시적인 생산량 감소로 특정 국산 품목의 가격이 올라간다고 해서 즉각적으로 무관세 시장을 열어버리는 것은 관세법의 취지를 완전히 살린다고 보기 어렵다. 다만 김규호 입법조사관은 “만약 지금이 김장철인데 비축 물량과 다음 작기 등을 감안해도 단기적 해법이 불가피한 상황이라면 한 번쯤 고려해볼 수 있는 제도”라고 말했다. 김장철에 배추 가격이 평년보다 수십 배가 오른다면 적어도 대한민국에서는 가계와 기업이 적지 않은 경제적·심리적 타격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갑작스러운 배추 수입 결정은 오히려 농업계가 품목별 자조금 단체 등을 통해 매매계약을 맺으며 농산물 수급 조절을 해오던 정책에 혼선을 빚을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9월4일 국내 최대의 고랭지 채소밭인 강원도 강릉시 왕산면 대기리 안반데기에서 고랭지 배추 출하가 한창이다. ©연합뉴스
기후와 먹거리 변화 알리는 ‘깃대종’
국내 최대 배추 생산지인 전남 해남에서 배추 농사를 짓는 김문희씨는 〈시사IN〉과의 통화에서 “정부와 소비자가 농부에게 시간을 조금만 주었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7월부터 9월까지 여름 배추가 나오는 시기는 1년 중 배추 생산량이 가장 적은 때다. 고랭지 배추는 강원도 등지에서만 수확되는 배추로 생산량이 한정적이기 때문이다. 특히 올해는 역대급 9월 폭염으로 고랭지 배추 수확량이 감소하면서 평소보다 심한 ‘배추 보릿고개’가 만들어졌다. “해남도 9월 말에 내린 폭우로 배추 작황에 타격이 클 거라 봤지만 어느 정도 회복하고 있다.” 김씨는 정말 배추를 수입해야 할 만큼 올해 본격 김장철(11월 중하순)에 타격이 될지 의문을 품고 있다. “올해 고춧가루가 굉장히 안 팔렸다. 배추 농사 짓는 사람들은 그해 김장양을 고춧가루 판매량으로 짐작한다. 김장 배추 공급량이 줄어들 수 있지만, 그만큼 김장 수요가 줄어들 확률도 높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산 배추 수입이 결정돼버리니 농부들도 맥이 빠진다.” 배추 공급량이 회복됐을 때 중국산 배추 물량까지 더해지면 가격이 곤두박질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한 전문가는 이번 사태를 ‘배추의 역습’으로 정의했다. 배추는 스마트팜으로 키우지 않는 대표적 노지 채소다. 시골에 가면 쉽게 배추밭을 볼 수 있다. 농민들에게도 친근한 작물이다. 자급을 위해서라도 다수 농부들이 조금씩은 밭에 심고 키운다. 농약이라는 인위적인 힘을 빌리기도 하지만, 배추는 자연의 최전선에서 자란다. 노지에서 자라는 배추는 기후와 먹거리의 변화를 알려주는 ‘깃대종’이다. 그런 의미에서 ‘배추의 역습’이라는 말은, 그동안 작물 재배 방식이나 수확 시기 등을 예측하던 관습에 불확실성이 커졌다는 것을 뜻한다.
김규호 입법조사관은 “기후위기 대응에는 많은 비용이 필요한다”라고 말했다. 정부가 새로운 먹거리 시스템을 구축하는 경제적 비용뿐만 아니라 수급 불안에 따른 소비심리를 안정화시키는 비용 역시 지불해야 한다는 뜻이다. “기후위기 시대에는 내가 원하는 만큼 언제든 무한정 식품을 구할 수 있다는 믿음이 아니라 불확실성이 언제든 상존할 수 있다는 먹거리 감각을 갖춰야 한다. 정부는 농산물의 생산량 등락에 따라 시민들이 불안하지 않게끔 정책을 설계하되 이런 새로운 감각을 공유할 방법도 함께 모색해야 한다.” 올해의 ‘배춧값 파동’은 정부의 먹거리 정책에 지금껏 유예되어온 숙제를 다시 던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