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작 기대했던 배 주산지, 한 달 사이 급변
[한국농어민신문 우정수·고성진·구자룡 기자]
올해는 평년 이상의 생산량을 기대했던 배 산지 분위기가 불과 한 달 남짓한 사이 급변했다. 봉지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배는 기대와 다르게 일소·열과 피해로 검붉게 물들었거나 갈라져 있는 과실이 상당수였다. 지난해는 냉해가, 올해는 장기간 이어진 폭염과 집중호우가 수많은 배를 삼켜버린 것이다. 올해는 큰 문제가 없을 것으로 기대했던 배 수급에도 차질이 불가피해졌지만 연이은 재해에 농가 피해가 심각한 상황이다. 더군다나 낙과 수량을 제외한 대부분의 일소·열과 피해는 재해보상에서도 제외돼 대책 마련이 시급한데, 정부에선 농가 지원에 대해 뚜렷한 대책을 내놓지 않고 있다. 배 생산 농가와 현장 관계자들을 만나 산지 분위기와 요구사항을 살폈다.
검붉게 물들거나 갈라진 과실
피해율 전국 평균 30% 수준
낙과물량까지 합하면 피해 더 커
▲수십 년 농사에도 처음 경험한 일소·열과 피해=16일 배 일소·열과 피해 상황을 직접 확인하기 위해 충남 천안시 직산읍 소재 배 농장 ‘이팜스’를 찾았다. 이팜스는 이희필 씨가 두 아들과 함께 운영하고 있는 농장이다. 가공용으로 활용할 배를 골라내던 이 씨는 갈라져 있거나 과실 일부가 검붉게 물든 배를 보여주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배는 아무데도 못 써요. 그냥 버려야지. 근데 이렇게 돼서 버린 배가 벌써 어마어마해. 50년 동안 배 농사지었는데, 정말 올해 같은 경우는 처음이에요.”
이팜스에서 선별장과 배 저장창고가 있는 곳으로 들어서자마자 일소 피해와 열과 피해를 입어 폐기하기 위해 모아 놓은 배가 곧바로 눈에 들어왔다. 선별작업이 이뤄지는 한켠에는 겹겹이 쌓아 올린 컨테이너 박스가 사람 키를 훌쩍 넘어 보였는데, 이 컨테이너에 들어있는 배 역시 모두 일소 피해와 열과 피해로 손상된 배였다.
이팜스의 배 재배면적은 10ha로, 개인 농장으로는 상당한 규모다. 기본적인 관리가 잘 된 농장으로 알려져 있고, 함께 배 농사를 짓는 아들 가운데 장남인 이욱용 씨의 경우 배 관련 분야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해 이론적인 부분에서도 전문성을 갖춘 농장인데도 이상기후로 인한 폭염에는 당해 낼 재간이 없었다.
이욱용 씨는 “우리 농장은 나무에 가지가 많은 편이라 과실이 햇볕에 그대로 노출되는 것을 상당부분 가려주는데도 피해가 많았다”라며 “배나무에 가지가 많지 않은 농장은 피해가 더 클 것”이라고 언급했다.
그에 따르면 이팜스의 연 평균 배 수확량은 배에 씌운 봉지 수량으로 80만개 정도다. 이 가운데 30%는 추석 물량으로 출하하고 나머지는 저장하는데, 저장량은 많으면 컨테이너 상자 1만개까지 나온다. 아직 저장할 배 손질작업을 마무리하지 않은 상태지만, 수확한 배에서 나오는 손실률이 어림잡아 30% 수준이다.
이욱용 씨는 “낙과한 물량까지 합하면 피해가 더 크다”라며 “올해는 배 창고에 여유가 생길 것 같다”라고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면서 “당장 올해가 걱정이긴 하지만 지금 나무 상태를 보면 내년 개화기에도 문제가 있을 수 있는데, 농가에선 그동안 해 왔던 것 외에는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다”라며 답답한 심정을 토로했다.
봉지 벗기지 않고 저장에 들어가
정확한 추가피해 예측도 안되고
선별 거치는 농가도 혀 내둘러
무르고 악취까지…가공도 못해
손쓸도리 없이 절반 가까이 매몰
▲전국 배 수확량의 30%가 피해=수확기에 발생한 일소와 호우가 맞물려 발생한 열과 피해는 전국 배 주산지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재해를 방불케 할 정도의 이례적인 현상이라는 게 주산지 관계자들의 반응이다.
한국배연합회와 농협경제지주가 파악한 피해 규모는 10월 8일 기준 주산지별 편차를 보이고 있는데, 추석 이후 작업량 중 피해율이 전국 평균 30%가량에 달하는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 충남 천안·아산과 경기 안성 등 중부권역과 전북 익산, 경북 상주, 경남 진주, 울산 지역의 피해가 큰 것으로 집계됐다.
아산 둔포농협이 60%로 가장 많고 천안배원예농협 30~50%, 안성원예농협 40~50%, 익산원예농협 40%, 상주원예농협 35%, 울산원예농협 35%, 경남 하동농협 30%, 문산농협 30%, 전남 순천농협 30%, 경기 안성 양성농협 30%, 평택원예농협 25%, 아산원예농협 20%, 전남 신북농협 20%, 영산포농협 15%, 나주배원예농협 10% 등 전국적으로 분포돼 있다. 조사 시점 이후에도 피해가 확산되면서 피해 규모는 조사치보다 더 늘어날 가능성이 크다.
심각한 문제는 추석 출하 물량 비중보다 남아있는 배 물량이 많아 향후 피해율이 더 커질 수 있다는 데 있다. 일반적으로 배 생산 물량은 추석과 설 판매 비중이 각각 30% 정도 차지해 이번 추석 출하 물량을 제외하고는 올해 생산량의 60% 이상이 저장에 들어가는 상황인데, 재배 과정에서 봉지 씌우기 작업이 이뤄지는 특성상 봉지를 벗기지 않고 저장 창고에 들어가는 경우도 많아 정확한 추가 피해 상황 예측이 쉽지 않은 실정이다.
조성원 천안배원협 차장은 “수확 이후 봉지를 벗기지 않은 상태로 저장고에 들어가기 때문에 저장고에 들어간 배가 멀쩡할 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상황이어서 향후 감모율을 예측하기 어렵다”며 “열과가 발생할 경우 즙이 주변으로 흐르기 때문에 같이 저장에 들어간 다른 멀쩡한 배의 품질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말했다.
봉지를 벗기고 육안으로 선별 과정을 거쳐 저장 작업을 하는 농가들도 추정치보다 훨씬 큰 피해에 혀를 내두르고 있다. 경남 진주 문산에서 배 농사를 짓는 이학구 한농연중앙연합회 직전회장은 “선별 과정에서 봉지를 벗기고 확인해보니 이미 물러지고 악취가 심해 배즙으로 가공할 수도 없어 절반 가까이 매몰하고 있는 실정”이라고 토로했다.
“농업재해로 포함, 신속히 보상해야”
낙과 일부 제외 보험적용 안돼
재해보험 기준 정립 등 시급
농식품부는 강 건너 불구경
농협·일부 지자체 발빠른 대응
▲일소·열과 배, 예외 없이 모두 보상해야=산지에서는 추석 무렵까지 열대야가 계속되는 등 고온이 장기화되는 기후 자체를 처음 겪어보는 데다 폭우까지 더해져 나타난 이례적인 열과 피해 확산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보고만 있는 상황이다.
특히 적과 후 열과 피해의 경우 농업재해보험 약관 자체에 들어있지 않아 피해보상 적용이 안 된다는 점에서 농가들은 ‘망연자실’하고 있다. 배는 봉지를 씌우기 때문에 일소 피해에 대한 리스크가 다른 과실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아 일소 피해에 대한 대비를 하지 않는 농가도 많은 실정이어서 이번 피해 여파가 더 크게 다가오고 있다.
이동희 나주배원예농협 조합장(한국배연합회 회장)은 “과실이 찢어지고 터지는 열과 피해의 경우 일소와 호우가 겹쳐 나타나는 피해인데, NH손해보험 쪽에서는 보험 약관에 들어있지 않아 낙과 물량 일부를 제외하고 보험 적용이 어렵다는 얘기만 한다”라고 전했다.
이동희 조합장은 “이번 피해가 전국적으로 나타난 측면을 볼 때 이는 고온과 폭우에 따른 농업재해로 포함해야 하고, 약관 개정 등 사후 조치는 물론 실질적인 농가 피해를 신속하게 보상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한국배연합회는 앞서 9월 30일 NH손해보험과 정부를 대상으로 한 건의문을 통해 △일소 피해에 대한 합리적인 재해보험 기준 정립 △창고 보관 물량을 포함한 열과 피해 보상 등 정부 차원의 가용 가능한 대책 마련 및 적극 지원을 촉구했다.
하지만 농림축산식품부 등 중앙정부 차원의 피해보상 방침은 여전히 나오지 않고 있어 산지 불만이 커지고 있다. 수급안정적립금 및 배자조금 등을 통해 10억원 가량을 배 가공용 수매 지원 및 생육회복 영양제 지원 등이 시행되고 있지만, 현장에서 요구하는 피해 보상 대책과는 온도차가 크다.
배 단체 관계자는 “농식품부가 대응책을 마련해보겠다는 얘기만 할 뿐 구체적인 피해보상에 대한 입장을 내놓지 않고 있다”면서 “현장 피해에 대한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등 대응책 마련에 소극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어 안타깝다”고 전했다.
이러는 사이 농협과 지방자치단체가 피해 지원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어 중앙정부의 태도와 대비되고 있다. 나주와 아산, 진주, 하동, 울산 등에서는 농가 지원 대책을 마련한 데 이어 주산지 농협도 자체 추경을 통해 지원에 나서는 상황이다.
#인터뷰-박성규 천안배원예농협 조합장
“태풍 피해보다 심각한데 농가보상 10원도 못 받는 게 말 되나”
국내 공급은 물론 수출도 문제
일소·열과피해는 ‘자연재해’
농작물재해보험 보장 이뤄져야
“지금이 태풍 피해보다 심각한 상황인데, 농가 보상은 10원도 못 받는 게 말이 됩니까.”
박성규 천안배원예농협 조합장은 일소·열과 피해로 인한 배 생산 농가 상황을 설명하며 답답한 마음을 토로했다. 박성규 조합장은 올해 배 생산량이 18만4000톤 정도였던 지난해와 같거나 오히려 더 내려갈 것으로 전망했다. 천안 지역은 물론 전국 배 주산지의 일소·열과 피해가 그만큼 심각하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박성규 조합장은 일소·열과 피해가 배 생산량에 직결되는 만큼 국내 공급뿐만 아니라 수출까지 올해도 배 수급에 문제가 생길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하지만 더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부분은 농가 피해 지원이다. 일소 피해와 열과 피해는 농작물재배보험 약관 상 일소 피해로 낙과한 일부 물량을 제외하면 대부분 보상이 어려운 것으로 알려져 있어서다. 박 조합장도 이 부분에 대해 목소리를 높였다.
박성규 조합장은 “이번처럼 긴 폭염과 집중호우로 재해가 일어난 것이 처음이다 보니 보상에 대한 부분이 약관에 없을 수밖에 없는데도 약관을 이유로 피해 인정을 하지 않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라며 “오히려 보험이 농가를 더 어렵게 하고 있다”라고 꼬집었다.
지난해 냉해 피해로 인한 손실에 올해는 일소·열과 피해까지 더해져 배 농가들의 어려움이 더 큰 상황이다. 피해 농가 모두 지원이 필요하지만, 소규모 농가들은 당장이 급하다. 천안배원협에선 농가 지원을 위해 긴급하게 2억원의 자체 예산을 마련했다.
박성규 조합장은 “과수 3000평, 4000평 농사짓는 사람들은 그 자체가 생계유지 수단인데, 여기서 40% 이상 손해를 보면 영농비용도 안 나올 수 있다”라며 “일소 피해로 낙과한 수량만 보상 가능한 부분으로 인정하고, 거기서 농가 자부담까지 제외하면 실질적으로는 보장받는 게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언급했다.
그러면서 “배 봉지 속 피해도 낙과처럼 피해로 인정하고 보험에서 도움을 줘야 농가들이 내년에도 농사지을 수 있는 준비를 할 수 있다”라며 “일소 피해, 열과 피해는 분명히 폭염과 집중호우에 의해 발생한 자연재해로, 재해보험 약관에 집중호우와 일소피해는 보장하는 손해로 명시돼 있는 만큼 이를 적용해 보상을 해주고, 정부도 농가들이 비상복구를 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조치를 취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천안=우정수·고성진 기자, 진주=구자룡 기자
출처:한국농어민신문 https://www.agrinet.co.kr/news/articleView.html?idxno=3316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