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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재난으로 기로에 선 제주 레드향 농가
조회 9
작성자 농어업회의소
작성일 2024/11/27

[한국농정신문 김수나 기자]

제주 레드향 농가들의 시름이 깊어지고 있다. 지난여름부터 가을까지 발생한 기록적 폭염으로 열과(쪼개짐) 피해가 속출했지만 뾰족한 대책이 없어서다. 레드향 열과는 농업재해로 인정돼 지난 14일까지 피해 신고가 접수됐지만, 농가들은 크게 기대하지 않는 분위기다. 쪼개진 과실이 이미 모두 썩어버려 사라졌는데 과연 정확한 피해 조사가 가능하겠느냔 반응이다.

피해가 인정돼 재난지원금을 받더라도 그간 투입된 농약대 일부에 그칠 것이 빤해서이기도 하다. 가장 큰 보상액은 나무를 뿌리째 뽑아내고 새로 심으면 지원되는 ‘대파대’인데, 일반 밭작물과 달리 수확하기까지 최소 4~6년 동안 소득 하나 없이 키우고 돌본 나무라서 뽑아내기도 쉽지 않다. 하지만 농가들은 레드향 농사를 그만둘지를 두고 고심에 빠졌다. 피해율이 80~90% 이르는 극심한 열과 현상이 지난해에 이어 2년째 발생해 농약대와 인건비만 겨우 건지는 ‘적자 농사’를 버티기 어려워서다.

지난 18일 찾아간 제주도 서귀포시 남원읍 신흥리 일원의 레드향 농장 나무들엔 수확기(1~3월)를 앞두고 주렁주렁 매달려 있어야 할 열매가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다섯 손가락으로 꼽을 만큼 열매가 달리지 않은 나무들이 대부분이었다. 나무 밑에는 까맣게 쪼그라든 나무 조각 같은 것들이 깔려 있었는데, 떨어져 말라비틀어진 레드향 열매의 잔해였다(열매가 쪼개지면서 드러난 과육이 점점 썩어 낙과).

이날 만난 농민들은 ‘레드향 농사는 이제 더는 희망이 없다’라고 입을 모았다. 10년 전 레드향 나무를 심고 수확 6년 차를 맞은 농민 고원하(800평 규모)씨는 급기야 레드향 나무 일부를 베어버렸다. “작년에도 너무 많이 (열매가) 깨졌지만 ‘한 번만 더 해보자’라며 했는데 올해도 다 깨져버렸다. 여름과 겨울에 덥지 말고 춥지 말라고 가리개도 해주고, 열과 방지 약제도 3번이나 뿌리면서 할 수 있는 건 다 해봤는데도 그랬다. 오죽 답답했으면 나무를 잘라버렸겠나.” 고씨는 ‘어떤 지원 대책이 필요하겠나’란 질문에도 “할 말이 없수다. 피해가 너무 심해서… 가온재배 할 땐 기름값으로 다 들어가고 한라봉으로 바꿨더니 가격이 안 되고, 레드향까지 이렇게 되니 이젠 뭘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갑갑하다”라며 허탈해했다. 고씨는 이번 열과 피해 신고에서 피해율을 90%로 적어 냈다. 800평이면 낮게 잡아도 수확량이 1만2000kg은 돼야 하는데, 현재로선 1000kg에도 못 미친다고 한다.

현재 레드향이 심긴 800평 규모 시설에서 세 번이나 작목을 바꿔 가며 30년 가까이 버텼지만, 자가 노동비와 약제비는 물론 시설 투자 비용도 제대로 얻지 못했다. 고씨가 “이 밭에선 돈을 한 번도 벌어보지 못했다”라고 말하는 이유다. 레드향은 당도가 높고 껍질이 얇아 소비자들의 선호도가 높은 고소득 작물이지만 2년 연속 발생한 열과 피해는 농가에 치명상을 입혔다. 이상기후에 취약하다는 점이 드러난 만큼 레드향 농가들은 기로에 선 상태다.

“그간 효자품목이라고 레드향을 많이들 해왔다. 과수라 한두 해 한다고 바로 수확할 수 있는 품목이 아닌데도 꿈을 안고 수년 동안 얼마나 애써 키웠겠나. 피해가 커지고 있지만 지자체도 대체 품목으로 어떤 게 좋은지 연구한 게 없는 것 같다. 그저 신품종만 나오면 한번 해보란 식이고 안되면 피해는 고스란히 농가 몫이 된다. 이러니 제주도가 농가부채 부동의 전국 1위 아닌가. 작물 전환을 위한 지원이 시급하다.” 김윤천 신흥1리 이장이 말했다.

900평 규모로 레드향 농사를 짓는 오상헌씨는 올해 피해율을 80% 정도로 신고했다. 오씨는 천혜향(930평)도 재배하는데 열매가 주렁주렁 매달린 천혜향과 달리 레드향 나무엔 과실이 거의 없었다. 열매 없는 나무들은 올해 열과로 인한 낙과가 극심했던 상황을 분명하게 보여줬다. “달려 있는 과실도 모두 팔 수 있는 건 아니다. 대과가 돼버리면(크기가 커버리면) 상품성이 없어진다. 한 나무에서 낙과가 많으면 남은 과실이 커져 버린다. 주변엔 피해율이 100%인 농가도 있다. 작년에도 마찬가지였다.” 오씨가 레드향 나무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농업재해 피해 신고 접수가 시작되기 전 발표된 제주도의 레드향 열과 누적 발생률은 37.0%(서귀포시 41.5%, 제주시 25%)인데, 오씨는 이는 사실과 다르다고 잘라 말했다. 서귀포의 경우 마을이나 농가별로 차이가 있지만, 평균 최소 50%는 넘고 열과 피해를 면한 농가도 극히 일부(10% 정도)라는 것이다. 레드향은 껍질이 얇아 원래 열과가 조금씩 발생하긴 했으나 올해는 바다에서 고온다습한 남풍이 불어온 데다 비까지 자주 내려 열매 성장에 가속도가 붙었다. 과육이 급속도로 커지니 껍질을 뚫고 나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실제로 올해 우리나라 여름철 해수면 온도(평균 22.8℃보다 1.1℃ 높은 23.9℃)는 최근 10년(2015~2024년) 중 가장 높았다. “레드향이 처음부터 이러진 않았다. 2년 전부터 쪼개짐이 많아지기 시작했고 작년부터 굉장히 심해졌는데, 기후 때문으로 본다. 사실 작년에 피해가 더 컸는데 피해 조사도 없었다. 1000평에서 20kg짜리 상자로 30개(1kg당 약 8000원, 480만원 상당)밖에 안 나왔다는 농가도 있었다. 2년 연속 적자다. 900평이면 예상 소득이 평균 7000만~8000만원 정도인데, 지금은 1500만원 정도다. 약값·비룟값·인건비면 들어온 돈은 바닥나고 시설 융자 원금이나 이자, 자가 노동비는 아예 엄두도 못 낸다. 생활이 되겠나?”

오씨는 이 같이 말하며 레드향 나무를 베고 내년 2월 새로운 품목으로 갈아타려 준비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과수의 경우 작목을 바꾸면 앞으로 4~5년은 수확은 물론 소득이 전혀 없고 새 작물이 잘될 거라는 보장도 없지만, ‘모험’을 감행하려 한다. 하지만 쉽게 희망을 품을 수도 없다. “그 이전에도 타격을 받은 상태에서 몇 년 동안 농사로 수입이 없으니 농가들이 굉장히 어려운 상황이다. 그렇다고 적자를 계속 이어갈 수도 없어 작목 전환을 하지만, 나중에 또 이런 상황이 생길 수도 있으니 사실 한숨만 나온다. 그렇다고 다들 하는 품목을 하면 과잉 생산되니 가격이 안 받쳐 주고 그나마 아직 젊으니까 새 품목을 해보려 한다.” 오씨는 이어 작목 전환과 수급 조절에 정부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기후위기 대응 품종의 현장 보급도 언제 될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기후변화로 병충해가 늘어 당장 농약값을 대기도 벅찬 것이 대다수 농가의 실정이기 때문이다. 또 천혜향처럼 기후에 잘 적응한 품종이라도 물량이 쏟아지면 농가들에 실질 가격이 보장되기 어려우니 출하 시기에 따른 가격 조절 등의 촘촘한 체계가 필요하다는 의미다.

농민 오상헌씨의 레드향 농장 모습. 1월부터 수확기가 시작되므로 예년 같으면 한창 열매가 주렁주렁 달려 있어야 할 때이지만 천혜향(아래)과 달리 극심한 열과로 인해 낙과된 레드향 나무엔 현재 남은 열매가 거의 없는 상태다.
농민 오상헌씨의 레드향 농장 모습. 1월부터 수확기가 시작되므로 예년 같으면 한창 열매가 주렁주렁 달려 있어야 할 때이지만 천혜향(아래)과 달리 극심한 열과로 인해 낙과된 레드향 나무엔 현재 남은 열매가 거의 없는 상태다.
농민 오상헌씨의 레드향 농장 모습. 1월부터 수확기가 시작되므로 예년 같으면 한창 열매가 주렁주렁 달려 있어야 할 때이지만 천혜향과 달리 극심한 열과로 인해 낙과된 레드향 나무(위)엔 현재 남은 열매가 거의 없는 상태다.
농민 오상헌씨의 레드향 농장 모습. 1월부터 수확기가 시작되므로 예년 같으면 한창 열매가 주렁주렁 달려 있어야 할 때이지만 천혜향과 달리 극심한 열과로 인해 낙과된 레드향 나무(위)엔 현재 남은 열매가 거의 없는 상태다.
레드향이 드러낸 부실한 농업 재난지원 체계

올해 레드향 열과 피해는 기후에 따른 농업피해 지원 체계의 구멍을 여실히 드러냈다. 레드향 열과는 농작물재해보험이 적용되지 않아, 피해 발생 시 정확한 조사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실정이다. 또한 농약대에 그치는 재난지원금으론 농가의 피해를 거의 보전할 수 없다는 현장의 지적도 이어졌다.

기후변화로 2~3년 연속 폐작 수준의 작황이 이어질 경우, 농가들이 더 이상 농사를 유지하기 어렵고 빚만 늘게 되는데, 이에 대한 지원책이 전무하다는 것도 문제다. 또한 기후변화에 취약한 작물을 다른 작목으로 전환해야 하는 과정의 부담도 오롯이 농가 몫이다.

김윤천 신흥1리 이장은 재난지원금은 농가가 회생할 수 있는 정도가 돼야 하고, 농작물재해보험 미적용 품목이라면 지자체 기금을 통해서라도 지원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아울러 김 이장은 기후위기로 새롭게 발생하는 피해에 대한 대응책을 마련하기 위해서라도 신속하고 충분한 피해 상황 조사, 폐작이나 작목 전환 시 융자 상환 유예와 이자 감면 지원이 시급하다고 제안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레드향은 하나의 사례일 뿐이다. 이제 이상기후가 `일상기후'가 되면서 새로운 피해가 계속 발생하는데 이에 대한 고민이 거의 없다. 농작물재해보험금은 가능한 적게 주려고만 하니 농가들과 계속 갈등하고, 제주도정 역시 피해가 발생해도 미온적이다. 작목 전환 비용이나 부채 상환 유예는 지자체도 선제적으로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계속되는 재난으로 빚에 몰리니까 심지어는 농민들이 극단적 선택을 할 위기감마저 감돈다. 소득 없이 임차료만 해도 수천만원을 물어야 하는 처지에서 과연 나라는 어디에 있고, 농민들에게 손을 내밀어 줄 누구라도 있는 건가 싶은 것이다.” 레드향 열과 피해 대책이 농업재해 인정에만 그쳐서는 안 되는 이유다.

출처 : 한국농정신문 https://www.ikpnews.net/news/articleView.html?idxno=65589